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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도편추방제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 제도

by garni 2024. 6. 27.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도편추방제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제도 중 하나입니다. 도편추방제는 특정 인물이 도시 국가에 독재자가 되거나,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될 때, 그 인물을 일정 기간 동안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였습니다.

 

도편추방제
도편추방제

 

도편추방제(ostracism)

도편추방제는 고대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독재자의 등장을 방지하고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한 제도로 도편은 도자기 조각을 의미하며, 투표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독재의 위험이 있거나 도시에 위험이 되는 특정 인물을 도시에서 10년간 추방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아테네 시민들은 과도한 권력을 가진 인물이나 잠재적인 독재자의 등장을 견제를 하였습니다.

 

 

도편추방제 기원과 배경

도편추방제는 기원전 5세기 초에 아테네에서 클레이스테네스에 의해 도입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아테네의 정치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이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여러 귀족 가문들이 정치적 권력을 쥐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권력 집중을 분산시키고자 도편추방제를 도입함으로써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고자 했습니다.

제도의 주된 목적은 권력을 남용하거나 독재자로 변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을 겪으며 강력한 지도자들이 필요했지만, 동시에 이들이 권력을 독점할 위험도 존재했습니다. 도편추방제는 이러한 위험을 줄이고,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였습니다.

 

 

도편추방제의 방법과 결과

도편추방제는 매년 시민들이 모여 도편추방제를 시행할지 여부를 결정했으며, 만약 다수가 시행을 원한다면,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의견을 도편에 적어 제출을 하였으며, 도편에는 추방하고자 하는 인물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특정 인물이 6000표 이상의 표를 받으면, 해당 인물을 아테네에서 10년 동안 추방을 하였습니다. 추방된 인물의 재산은 몰수되지 않았으며, 10년 후에는 다시 아테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도편추방제가 정치적 숙청이 아닌 일종의 예방책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도편추방된 대표적 인물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에서 추방자로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524년경에 태어난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입니다. 아테네의 해군력 상승을 시켰으며,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이끈 영웅으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게 한 결정적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후 정치적 경쟁으로 인해 도편추방제로 추방이 되었으며, 이후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페르시아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부하가 되어 마그네시아 사트라프 시기에 기원전 459년경에 66세의 나이로 사망을 하였습니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 공정한 사람

아리스티데스는 기원전 530년경에 아테네에서 태어난 아테네의 정치가입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성품으로 공정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습니다. 마라톤 전투 업적으로 집정관으로도 선출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티데스는 정치적 라이벌인 테미스토클레스와의 정치적 대립이 일어났으며,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둔 반면, 아리스티데스는 육군을 강화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투표가 실시 되었으며,  한 문맹의 아테네 시민이 아리스티데스에게 도편에 아리스티데스'라고 적어달라고 요청을 하자, 아리스티데스는 그 시민에게 아리스티데스가 무슨 잘못을 하여서 투표를 하는지 물었고, 그 시민은 아리스티데스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그의 별명인 공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듣는 게 짜증이 나서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리스티데스는 기원전 485년에서 482년 사이에 도편추방을 당한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페르시아 제국이 아테네를 침략하자 기원전 480년에 아테네로 복귀를 할 수 있었으며, 살라미스 해전에 참전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아테네의 배신자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50년 경에 태어난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입니다. 알키비아데스는 뛰어난 외모와 카리스마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으며, 정치가이자 군사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야망과 변덕스러운 성격은 많은 논란과 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알키비아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칠리아 원정도 중 신성모독 혐의로 기소가 되면서, 아테네를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도망을 가서 아테네에 결정적 패배를 안겨 주었습니다. 이후에는 페르시아로 도망을 가였으며, 이후 다시 조국인 아테네로 복귀를 하였으나, 이후 아테네에서 다시 추방을 당하였으며, 기원전 404년경에 45~46세의 나이에 암상을 당합니다.

 

 

도편추방제의 한계와 문제점

도편추방제도 완벽한 제도는 아니었으며,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도편추방제가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었으며, 실제로 일부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 제도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도편추방은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했으며, 추방된 인물은 10년 후 다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또한, 도편추방제를 둘러싼 갈등과 논쟁은 사회적 불안을 초래할 수 있었으며, 이는 때로는 민주주의의 약화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즉,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도편추방제의 의미

현대 사회에서 도편추방제와 같은 제도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근본정신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권력 남용을 방지하고,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증대시키기 위한 다양한 제도와 정책들이 여전히 중요합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선거, 국민 투표, 탄핵 제도 등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편추방제는 정치적 견제와 균형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주며, 어느 시대나 권력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으며, 이를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수적입니다.

 

 

결론

고대 아테네의 도편추방제는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독특한 제도였으나, 그것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이 제도는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정치적 참여를 촉진하는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었지만, 정치적 악용 가능성과 임시적인 성격, 그리고 사회적 불안을 초래할 수 있는 부작용도 동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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