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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장미 전쟁, 영국 왕좌를 둘러싼 붉은 장미와 흰 장미의 대립

by garni 2024. 11. 24.

장미전쟁은 영국의 왕위를 둘러싼 내전으로, 1455년부터 약 30여 년간 이어진 왕위 계승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당시 영국의 두 주요 귀족 가문인 요크와 랭커스터가문 간의 권력 다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두 가문은 각각 흰 장미와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삼았으며, 이로 인해 전쟁은 장미 전쟁이라고 불리며, 장미 전쟁 이후 튜더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장미전쟁
장미전쟁

 

장미 전쟁의 시작

장미 전쟁의 배경에는 14세기부터 15세기 초까지 이어진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와, 왕권 약화와 귀족들의 권력 확장이 주요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헨리 6세가 정신적 불안정으로 인해 왕으로서의 권위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당시 헨리 6세는 랭커스터가 출신의 왕으로,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놓고 요크가의 리처드와 갈등을 빚고 있었습니다.
랭커스터가와 요크가는 각각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상징으로 삼았으며, 이 상징에서 유래해 장미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두 가문은 왕위와 권력에 대한 정통성의 문제로 분열되었고, 헨리 6세의 불안정한 통치가 이 갈등을 심화시키며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헨리-6세
헨리 6세

치열한 왕위전쟁

장미 전쟁은 여러 차례의 주요 전투와 귀족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전투는 1455년의 세인트올번스 전투로, 이는 장미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충돌이었습니다. 이후 양측은 잉글랜드 전역에서 다양한 전투를 벌였고, 전투마다 왕위가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1461년에 요크 가문 출신의 에드워드 4세가 전투에서 승리하며 왕위에 오르면서 요크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랭커스터 가문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반격을 이어갔으며, 결국 1470년에는 헨리 6세가 복위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는 다시 군사를 일으켜 1471년 바넷 전투와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헨리 6세를 다시 폐위시키고 자신의 왕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바넷전투
바넷전투

전쟁의 종결과 튜더 왕조의 시작

장미 전쟁은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헨리 7세)가 요크가의 리처드 3세를 패퇴시킴으로써 종결이 되었으며, 헨리 7세는 리처드 3세의 죽음 후 왕위에 오르며 튜더 왕조가 탄생을 하였습니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혼인을 하며 랭카스터가의 직계가 아닌 헨리 7세는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강화을 하였으며, 랭가스터가와 요크가의 결합으로 장미 전쟁은 상징적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이 결혼은 영국 내분을 종식하고 왕가의 통합을 이루었으며, 튜더 왕조의 시작은 영국의 새로운 정치적 안정기를 열며, 중세의 봉건 귀족 권력에서 중앙 집권적 왕권 강화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튜더 왕조는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강력한 군주들을 배출하며 영국을 세계의 강대국의 위치로 끌어올리게 됩니다.

 

헨리-7세
헨리 7세

결론

장미 전쟁은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자리 잡은 사건입니다. 이 전쟁을 통해 중세 봉건 체제가 점차 약화되고 중앙 집권적 왕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튜더 왕조의 시작은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특히 헨리 7세의 통치와 그의 후계자들이 보여준 강력한 리더십은 영국을 내부적으로 안정시키는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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