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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조카의 왕위 찬탈과 장미전쟁의 종결, 리처드 3세

by garni 2024. 11. 26.

리처드 3세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잉글랜드의 요크 왕조 마지막 군주였으며, 장미 전쟁의 종말을 알린 보즈워스 전투에서 사망한 인물입니다. 리처드 3세는 자신의 통치와 관련된 정치적 선택뿐 아니라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리처드-3세
리처드 3세

 

요크가의 마지막왕, 리처드 3세

리처드 3세는 1452년 10월 2일에 요크 공작 리처드 플랜태저넷과 세실리 네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플랜태저넷 가문에 속했으며, 15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적 혼란기였던 장미 전쟁 당시 성장했습니다. 이 전쟁은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의 왕위 계승 다툼으로, 리처드는 일찍이 자신의 가문과 그들의 권력 투쟁에 깊이 얽히게 되었습니다. 1461년에 리처드의 형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리처드는 글로스터 공작으로 임명되었으며,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리처드 3세의 조카 왕위 찬탈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섭정으로 동생 리처드를 지명을 하였으며, 형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5세를 섭정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몇 달 후, 에드워드 4세의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조카들의 적법성을 부정하며,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1483년 왕으로 즉위를 하였습니다. 이후, 폐위된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 리처드 요크 공작을 런던탑에 감금한 뒤 이 두 왕자는 그 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탑 속의 왕자들의 실종은 오늘날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리처드가 암살을 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리처드 3세의 왕위 찬탈은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권력욕과 냉혹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적잖은 적을 만들게 했습니다.

 

 

짧았던 재위기간

리처드 3세의 재위 기간은 단 2년(1483~1485)에 불과했지만, 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법 체제를 강화하고, 경제적 안정화를 도모했으며, 소작농과 상인 계급을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하려 했습니다. 특히, 부당한 세금 징수를 제한하고 법원의 공정성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통치 기간 동안 내외부적으로 끊임없는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에드워드 4세의 충성파와 랭커스터 가문의 지지자들은 리처드의 정권에 반발했으며, 이는 몰락을 부추긴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보즈워스 전투와 리처드 3세의 죽음 그리고 장미 전쟁의 종결

1485년에 리처드 3세는 보즈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와 맞섰습니다. 이 전투는 리처드의 마지막이자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됩니다. 리처드는 전장에서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패배하고 전사했으며, 시신은 근처에 매장되었습니다. 리처드 3세의 죽음은 요크 왕조의 종말을 알렸고, 튜더 왕조의 시작을 예고했습니다. 2012년에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레스터 시의 한 주차장에서 발견되며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이 발견은 리처드 3세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의 이미지 재평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리처드 3세의 발견과 레스터 시티 우승

2016년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한 레스터 시티는 전년도 강등권 탈출을 겨우 이뤄낸 팀이었습니다. 우승 확률은 5000 대 1로 책정되었으며, 이는 축구 역사상 가장 낮은 가능성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리처드 3세의 유해가 레스터 대성당에 정식으로 안치된 직후 레스터 시티의 성적이 놀랍도록 좋아지기 시작을 하며 우승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일부 팬들은 리처드 3세 덕분이라고 부르며 우승을 왕과 연결 지었습니다. 물론 이는 농담에 불과하지만, 지역 주민들에게는 역사와 스포츠가 얽힌 특별한 이야기로 자리 잡았습니다.

 

 

리처드 3세의 평가

리처드 3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세에서 등이 굽은 악당으로 묘사되며 대중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역사학자들은 그의 통치와 정치적 선택에 대해 보다 공정한 평가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개혁 정책과 군사적 능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반면, 왕위 찬탈과 왕자의 실종 사건은 여전히 논란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결론

리처드 3세는 2012년 유해가 발견되며 역사적으로 재조명을 받기도 하였으며 재위는 짧았지만, 개혁과 정책을 통해 잉글랜드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시도한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그러나 조카들의 왕위 찬탈과 실종 등 통치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은 리처드 3세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강화했습니다. 보즈워스 전투에서의 패배와 죽음은 요크 왕조의 몰락을 의미하였으며, 튜더 왕조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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