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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프랑스에 강력한 중앙집권의 기틀을 세운 미남왕 필리프 4세

by garni 2024. 11. 27.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중세사를 장식한 강력한 군주로, 미남왕 필리프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1285년부터 1314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이 시기는 프랑스의 최전성기 중 하나였습니다. 재위 기간 동안 프랑스 왕국은 정치적·경제적·종교적 대립으로 가득 찬 격변의 시기를 겪었으며, 교황청과의 갈등,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 구축, 성전기사단의 해체 등 특징으로 꼽힙니다.

필리프-4세
필리프 4세

 

미남왕 필리프 4세

필리프 4세는 1268년에 필리프 3세와 아라곤의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잘생긴 외모로 미남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습니다. 17세 때는 나바라 왕국의 후계자인 잔 1세와 혼인을 하면서 결혼 동맹을 통해 통치 초기부터 영토 확장과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노력을 했습니다. 1285년 아버지 필리프 3세의 사망 후 왕위에 오른 필리프 4세는 중앙집권화와 왕권 강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봉건 제도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으나, 필리프 4세는 이러한 체제를 재정비하며 중앙집권국가체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중앙집권화와 행정 개혁

필리프 4세는 프랑스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진전시킨 군주였습니다. 지방의 봉건 영주들로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행정 체제를 정비하고 전문적인 관료제를 도입했습니다. 필리프 4세는 법률 전문가, 세무관 등을 중용해 국왕의 권위를 전국적으로 확립하려 했습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왕국은 더 이상 봉건 영주들의 연합체가 아닌, 강력한 중앙 정부를 가진 국가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을 개혁하고, 새로운 과세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정책은 왕국의 경제 기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302년, 필리프 4세는 삼부회를 소집하여 성직자, 귀족, 평민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삼부회는 필리프 4세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으며, 세금 부과와 정책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얻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교황청과의 대립, 아나니 사건과 아비뇽 유수

필리프 4세의 가장 유명한 정치적 충돌 중 하나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갈등입니다. 이 갈등은 주로 과세 문제와 교회의 권위 문제로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이는 교황청의 반발을 샀습니다. 교황은 우남 상크탐 (Unam Sanctam)이라는 칙서를 통해 교회의 권위를 주장했으나, 필리프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황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결국 1303년에 필리프는 자신의 측근인 기욤 드 노가레를 통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아나니에서 체포하는 아나니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은 교황권 쇠퇴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며, 필리프는 이를 통해 자신의 세속적 권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필리프는 아비뇽에 교황청을 설치하도록 압박하여 이른바 아비뇽 유수를 시작하게 했으며, 이는 교황권이 프랑스 왕권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성전 기사단의 몰락

필리프 4세의 또 다른 논란의 중심에는 템플 기사단이 있었습니다. 1307년부터 필리프 4세는 막대한 부를 보유하고 있던 성전기사단을 탄압했습니다. 기사단이 이단이라는 혐의를 씌워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사단원이  고문을 받았고, 총장인 자크 드 몰레와 여러 기사단원등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필리프 4세의 재정적 필요와 기사단의 영향력에 대한 견제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실 재정을 일시적으로 보강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행동은 중세 유럽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경제 개혁과 세금 정책

필리프 4세는 경제적으로도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국가 재정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세금을 신설하고 은화를 재발행하여 통화 체제를 개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종종 물가 상승과 국민의 불만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대인과 외국 상인들에 대한 경제적 억압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를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이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재정적 이익을 얻었으나 장기적으로는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습니다.

 

 

외교와 전쟁

필리프 4세는 외교적으로도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플랑드르와의 전쟁을 통해 프랑스 북부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며, 잉글랜드와의 관계에서도 군사적 충돌과 협상을 반복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프랑스의 국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막대한 전쟁 비용을 초래해 내부적으로 불안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필리프 4세의 영향

필리프 4세는 냉혹하고 실용적인 군주로서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교황권의 약화를 이끌며 세속 권력의 중요성을 부각했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로의 전환을 가속화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압적인 통치 방식과 경제 정책은 일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결론

필리프 4세는 중세 프랑스를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중대한 변화의 중심에 두며 강력한 왕권을 구현한 군주였습니다. 중앙집권화를 강화하고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도약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교황청과의 대립, 템플 기사단 해체, 삼부회 소집 등의 과감한 정치적 행보는 냉철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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